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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과 빗돌, 정려각

[김천 감천면 볼거리] 전설의 고향이냐고요? 문랑, 효랑 이효각에서 조선시대 묘지소송을 본다!

by 노을(NoEul) 2021.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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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던 8월 중순에 문랑이 효랑이 자매의 억울한 넋이 깃든 <이효각>에 다녀왔지요.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마을에 있는 <문랑효랑 이효각>인데요.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263-1

 

언니와 동생, 그러니까 자매의 넋을 기리는 정려각이랍니다.

이 자매의 이름은 언니가 문랑이, 동생이 효랑이랍니다.

무슨 전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고요.

실제로 조선시대에 있었던 실존 인물을 기리는 비각이랍니다.

이 비각의 정식 이름은 <문랑효랑이효각(文娘孝娘二孝閣)>입니다.

만고 효녀 죽산 박씨 증시 문랑 효랑 지비 (萬古孝女 竹山朴氏 贈諡 文娘 孝娘 之碑)라고 쓴 빗돌입니다.

 

문랑과 효랑 자매는 당시 성주에 살던 죽산 박씨인 박수하의 딸로 1709년(숙종35)에 현풍의 권력가인 청하 현감 박경여한테 자기 가문의 선산을 빼앗깁니다.

부자인 데다가 권세가였던 박경여가 이 박수하의 선산에다가 자기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려고 했다네요.

그걸 막으려고 했지만 박경여는 박수하의 조부모의 묘를 파내고 자기네 할아버지 묘를 이장하고 비석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세상에나! 뭐 이런 일이 다 있습니까?

 

문랑이 효랑이 아버지 박수하는 선산의 묘지를 되찾으려고 온갖 애를 썼으나 오히려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 끝에 7일 만에 태장을 맞고 돌아가셨답니다.

당시 19살이던 언니 문랑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관가에 가서 고했지만 당시 성주목사는 만나주지도 않았답니다.

그에 분하여 박경여가 이장한 묘를 파헤치고 알렸더니 사병을 거느리고 와서 창으로 찔러 죽이고 말았답니다.

 

이효각(二孝閣)

두 효녀를 기리는 정려각이라는 말이지요.

 

 

졸지에 아버지랑 언니까지 모두 잃고 16살인 동생 효랑이도 두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서울로 가서 백방으로 호소를 하고 다녔답니다.

그 소문 때문에 어사가 출두하게 되고 실제로 어사가 와서 언니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 검시를 하는데 시신이 하나도 썩지도 않았답니다.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서 전국의 유생들과 성균관까지 들고일어났다네요.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이런 묘지 분쟁이 꽤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묘지 분쟁을 <산송>이라고 했다네요.

 

이런 일이 있은 뒤 1724년(경종 4)에 언니 문랑한테 정려가 내려지고 효랑한테는 복호가 내려졌답니다.

복호란 충신이나 효자, 군인 등 특별한 사람한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주는 걸 말합니다.

그 뒤에 효랑은 합천에 있는 남평 문씨 문동도의 아들 문우징한테 시집을 갔으나 안타깝게도 25살에 죽고 맙니다.

효랑의 정려도 시가 쪽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내려졌다고 하네요.

또 영조는 죽은 언니한테는 문(文), 동생한테는 효(孝)라는 시호와 함께 정려를 내렸다고 합니다.

배롱나무 붉은 빛깔이 오늘 왠지 문랑이와 효랑이의 넋인 듯 보이기도 하네요.

청현사(淸顯祠)는 문랑과 효랑의 이효각 위쪽에 있는 사당인데

죽산 박씨 문헌공 박원형과 그의 부인을 영원히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불천위 사당입니다.

훗날 후손들이 문랑과 효랑의 정려각을 이쪽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사당 청현사 안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선산을 되찾으려고 죽기까지 하며 애썼던 문랑,

그리고 아버지와 언니의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린 동생 효랑

참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가 깃든 곳입니다.

 

훗날 1934년에 효녀 문랑과 효랑이의 삶을 담은 이야기가 문학 작품으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출천대효효낭전(出天大孝孝娘專)>이 책이 나왔는데, 당시에 박경여의 문중 사람들이 이 소설이 나오는 대로 사서 불태워 없앴다고 하네요.

 

오늘은 마치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슬프고도 억울한 이야기가 깃든 <문랑 효랑 이효각>을 소개했습니다.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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