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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와 서원, 서당

<청송 송학서원> 퇴계 이황이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던 청송에 세운 서원

by 노을(NoEul)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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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송학서원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 마을에 있는 <송학 서원(松鶴書院)>입니다.

굉장히 너른 터에다가 세운 서원이네요.

송학서원이라더니 서원 앞에 키큰 소나무들이 꽤 많이 있네요.

서원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송학서원 관리사

송학서원 외삼문은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문이 닫혀 있고요.

이 관리사가 있는 뒤로 보이는 담장 쪽으로 드나들 수 있게 했네요.

담장과 담장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서 여기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송학서원 강당입니다.

정면이 4칸, 옆면이 2칸짜리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임하면서 청송을 돌아보며 ‘청송백학수무분 벽수단산진유연’(청송의 백학은 비록 연분이 없어도 벽수의 단산에는 인연이 있나 보네)이라고 읊은 싯구 중 ‘송’과 ‘학’ 자를 따서 송학서원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강당과 마주 보고 있는 저기가 바로 외삼문입니다.

외삼문 너머로 키 큰 소나무들이 많이 있네요.

송학서원 강당이고요.

그 뒤로는 사당이랍니다.

마당에는 푸른 풀잎들이 깔려있네요.

우리가 찾아간 때는 10월 9일이었답니다.

여기는 동재입니다.

동재도 정면이 4칸이네요.

송학서원의 동재와 서재 모두 정면 4칸, 옆면 2칸짜리이고요.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동재 편액은 <직방재

(直方齋)

>라고 걸었네요.

동재인 직방재에서 마주 보는 서재와 강당입니다.

이번에는 외삼문 쪽에서 보는 강당과 양쪽 동재와 서재입니다.

서재인 존성재입니다.

서재도 4칸짜리 건물입니다.

서재에는 <존성재(存省齋)> 편액을 걸었습니다.

이번에는 서재에서 보는 강당과 동재 존성재입니다.

서재인 존성재 툇마루

송학서원 강당 뒤로는 배향 공간인 사당이 있습니다.

송학서원에서 배향하는 분은 세 분인데요.

퇴계 이황 선생과 그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 그리고 여헌 장현광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입니다.

송학서원 사당인 <존덕사>입니다.

사당은 정면 3칸, 옆면 1칸짜리 맞배지붕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오랫동안 관직에서 중앙 정치를 해왔는데 기묘사화 등 권력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청송에 와서 머물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청송 부사'로 오기를 원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 뜻은 이루지 못하고 '단양 군수'로 임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청송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는 퇴계 이황

또 실제로 입향조가 '진성 이 씨'의 본관이 있는 청송 진보랍니다.

선생과 그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 여헌 장현광 선생을 함께 배향하는 서원이 바로 <송학 서원>입니다.

동재에서 바라보는 강당

존덕사에는 대학자 퇴계를 비롯한 유학자 세 분의 위패를 모셔 놓았습니다.

송학서원 강당 뒷모습입니다.

우리가 아까 들어왔던 곳에서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사당인 존덕사, 강당, 그리고 동재와 서재 마지막으로 가장 오른쪽에 보이는 외삼문입니다.

송학서원은 처음에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가 1568년 명당리에 세운 명지재 서당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서원으로 세웠지요.

그러다가 서원 철폐령이 내릴 때에 <송학서당>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보호를 했다고 합니다.

송학서당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송학서원>으로 고쳐 세운 게 1996년이라고 하네요. 

마당에 가득 피어있는 민들레 홀씨가 아주 예쁘네요.

시월인데도 이렇게 많이 피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들머리입니다.

담장 사이로 이렇게 통로를 만들어서 참 좋네요.

송학서원을 나와서 보는 장전리 마을 집들이 매우 정겹습니다.

지붕 빛깔도 알록달록 예쁘네요.

참, 예부터 이 장전리 마을에는 곡식창고가 있던 <창말>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안덕면의 곡식창고가 있었던 곳이 바로 여기랍니다.

 

오늘은 퇴계가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던 청송!

그 마음을 기려 세운 서원인 <송학서원>을 둘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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