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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과 빗돌, 정려각

[의병장 학촌 박이룡 신도비] 김천 대항면 덕전리 세송마을

by 노을(NoEul) 2022.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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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대항면 덕전 3리 세송 마을입니다.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 장군의 신도비와 재실입니다.

세송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오니, 세송 작목반이라는 곳 앞에 굴이 나오네요.

이 굴을 지나가야 합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곳입니다.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유모차를 밀며 걸어가시네요.

천천히 천천히 틈을 두고 따라갔습니다.

어머나~! 바로 굴 끝까지 나오니 저기 앞에 비각이 보입니다.

여긴가?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 신도비 · 학촌재

아하, 맞습니다.

이게 바로 의병장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 장군을 기리는 <박이룡 신도비>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건물은 재실인 듯하네요.

네 맞습니다. <학촌재(鶴村齋)>입니다.

 

박이룡 장군은 충주 박 씨로 1533년(중종28년)에 영천 부사를 지낸 박성건과 흥덕장씨의 7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자는 시윤(施允), 호는 학촌(鶴村)입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61년(명종16) 진사시를 거쳐 1577년(선조10)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77년(선조10)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그 이듬해 예조정랑(禮曺正郞),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580년(선조13)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고 합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5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효를 다했는데, 호랑이가 곁에 와서 함께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김천의 인물들은 호랑이도 감동하는 효성스러운 분들이 많네요. 앞서 올린 남정 김시창 선생도 시묘살이 때에 그랬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1592년에 무고죄로 원주로 유배를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에 사면을 받아 향리인 황간에 내려왔지요. 

 

이때 선생은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 5백 명을 모아 의병을 모아 황의장(黃義將)으로 김천 일대에서 많은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 전투였던 부상 고개 전투, 지례 전투에서는 왜병 1.500명을 무찔르기도 했답니다.

 

그 뒤엔 능성현령(지금의 화순군)을 지내다가 1593년 4월 30일 지난 부상전투에서의 부상이 덧나 능성현 관아에서 63세로 돌아가셨습니다. 훗날 1812년(순조12) 영, 호남 사림들의 상소로 이조참의로 증직이 되었으며 1991년 매곡면 공수리에 공적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박이룡 장군의 신도비각 앞 사마귀의 자세가 굉장히 위협적이네요. 마치 신성한 구역이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듯이요.

박이룡 신도비는 앞뒤로 빼곡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장군의 의로운 삶을 기록했겠지요?

재실 앞에서 보는 박이룡 신도비

재실인 학촌재(鶴村齋)는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하는 수없이 이렇게 담장 너머로 이렇게밖에 볼 수가 없네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오늘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학촌 박이룡 장군 신도비와 학촌재를 둘러봤습니다.

지난여름 8월, 무더위가 한창일 때에 다녀온 이야기랍니다.

함께 보면 좋을 김천의 효자 이야기도 함께 덧붙입니다.

 

https://redsky77.tistory.com/87

 

<김천 봉산면 신암리 효절공 남정 김시창 효절각> 임금도 감동하고 호랑이도 감동한 효성

앞서 쓴 영동 송계서원 유허비각을 보고 송계 육 선생 중 한 분인 효절공 남정 김시창 선생이 떠올려졌네요. 지난봄에 김천 봉산면 신암리에 있는 김시창 선생 정려각을 다녀왔지요. 그걸 소개

redsky77.tistory.com

 

찾아가는 주소는 김천시 대항면 덕전리 799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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